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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_2019/밑줄긋기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자음과모음 출판사를 중심으로 시사와 현실을 분석하고 담론을 생산하던 집단이 최근 또하나의 시도를 시작한 모양이다. 계간지 '자음과모음'에 주로 참여했던 인사들이 주축이 돼 'Momento hoc Momentum: 이 순간을 기억하라', 줄여서 '모멘툼'이라는 무크지를 새롭게 선보였다. 무크지라고 하지만 여러명의 필자가 참여한 문고판 단행본의 느낌을 준다. 첫 주제는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다. '극우주의'라는 주제 앞에 '지금'과 '여기'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인 것은 분석과 논의의 현재성, 동시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리라.


지지난해에서 올해에 이르는 기간에 '일베'로 대표되는 극우주의 또는 '넷우익'(일본에서 먼저 명명된 명칭인 듯 하다)  집단 또는 현상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었다. 이들이 쏟아내는 지극히 선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고, 심지어 패륜적인 언사에 대해선 이른바 '보수언론' 조차도 섣불리 편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오늘도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시신을 담은 관을 '택배'라고 폄훼한 20대가 항소심에서 모욕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들이 어떤 개인들이며, 집단으로서 이들은 어떤 점을 공유하는지, 일견 보기엔 전혀 무논리적으로 보이는 말들, 아니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직설적이고 적나라하게 쏟아내는 여성 비하, 외국인 노동자 혐오, 특정 지역에 대한 조롱과 비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들에 대한 분석의 층위는 다양했지만 인터넷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오프라인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사이버 공간 상의 병리현상을 넘어 현실의 사회적 현상으로 전환됐거나 전환되고 있다는 데에 있어서는 의견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이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의까지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엊그제 프랑스에서 12명의 사망자를 낸 언론사 테러사건은 '표현이 자유'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조짐이다.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는 6명의 필자가 제각각의 주제에 대해 각자의 방식대로 풀어나가다보니 정돈된 논의라기보다는 잡지식의 다채로운 시각과 논거를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인상깊은 대목들을 밑줄쳐 본다.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 10점
김민하 외 지음/자음과모음(이룸)



1장. 공백을 들여다보는 어떤 방식: 넷우익이라는 '보편증상'-박권일


이들의 목적은 이념도 사상도 아니며 인정이나 명성도 아니다. 주목(attention)이 가져다주는 쾌락을 향한 맹목적 추구. 일베의 동기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는 필터의 하나는 바로 정보사회의 인간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등장한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다. 그래서 국정원은 이 목적 없는 쾌락주의자들을 마음껏 자신의 목적에 동원할 수 있었다. (43~44쪽)


커뮤니티 전쟁은 종종 정당한 이유 없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일베의 혐오 담론은 정당화의 포즈조차 없는 노골성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혹자는 '로버스 케이브 공원 실험'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54년 심리학자 무자퍼 셰리프는 비슷한 또래, 비슷한 가정환경의 소년들을 캠핑장에 모은 다음 편을 갈라놓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두 '부족' 사이에 강렬한 적대와 갈등이 발생했다. (중략) 소설 <파리대왕>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던 고전적인 사회심리학 실험이다. 그런데 일베의 행태는 정말 아무 이유가 없는 '묻지마 폭력' 같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50쪽)


그것은 바로 주목경제가 아닐까 한다. 고도 정보화 사회에서 인간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토머스 데이븐포트 등의 경영학자들, 그리고 찰스 더버 등의 사회학자들이 발전시켜온 개념이다. 간단히 말해 타인의 주목을 추구하는 활동이 최우선 순위를 점하게 되는 경향성 또는 사회 환경을 가리킨다. 주목경제 개념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인지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먼의 '정보 풍요' 착상, 즉 정보량이 많아질수록 관심이라는 자원이 부족해진다는 착안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정보를 소비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게도 수용자의 관심을 소비하는 것이다. 정보가 넘쳐날수록 관심은 부족해진다."

  주목경제는 주목 경쟁(attention struggle)을 통해 성립한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담백하고 점잖게 말하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관심을 받기 위해 발언 수위나 행동이 점점 과장되거나 자극적인 행태가 된다. 심지어 주목을 받기 위해 일부러 비난받을 행동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소위 '노이즈 마케팅'이다. 주목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 이렇게 살벌한 시대이기에 어찌 보면 인정 투쟁은 목가적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51~52쪽)




3장.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김진호


그런데 1988년의 NCCK의 문건이 나온 뒤에 개신교의 반공주의가 표면 위로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예장 통합에 속한 노령의 월남자 출신 엘리트들이 주도하여 여러 교단을 아우르는, 심지어 분립한 이후 서로 앙숙이었던 예장 합동의 원로 지도자들까지 포함된 교계 지도자들이 모였다. 하여 이듬해인 1989년 12월 한기총이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가맹 교단의 수가 무려 36개였으니, WCC를 지지한 교단 수가 불과 6개인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세력을 과시할 만한 것이었다.

  한기총은 창립 이후 1997년까지 다섯 명의 단체장이 모두 이북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남한 출신 지도자들도 한기총 회장으로 선출되기는 했다. 이러한 변화는 월남자 출신 엘리트들이 고령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기총이 가맹 교단과 교회의 지분의 크기에 비례하는 의결권을 갖는 조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997년 이후에는 한기총이 대변하는 반공주의적 기조가 개신교 전체로 확산되었음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124~125쪽)


개신교의 가파른 성장세는 1990년 어간 이후 급격하게 둔화되었고, 1990년대 말 혹은 2000년대 이후 교세가 감소세에 들어서게 되었다. 각종 제도와 인식은 온통 성장주의적으로 세팅되었는데, 성장은 멈추거나 감소세인 상황, 이것은 개신교의 수많은 병리 현상으로 표출되었고, 자체 개혁의 잠재력을 빠르게 상쇄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개신교 교회와 신자의 자신감은 크게 상실되고 자괴감이 증폭되었다. 한데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한기총의 공격적 반공주의는 기묘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신앙적.감정적 장치는 위기의 근원을 개신교 신자들의 정체성 내부에서 외부로 전환시킨다. 문제는, 근본주의적 개신교 신앙이라는 낡고 매력 없는 종교를 내면화한 '우리'의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세계를 타락시키는 '우리 외부의 적'에 있다는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종북주의자들이 한번도에서 바로 그런 '적'의 실체다. 하여 이 '적'을 색출하여 세상에서 뿌리 뽑기 위한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기총식의 메시지는 상실감에 빠진 개신교 신자에게 목표 의식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 목표 의식과 생기는 분노하는 감정이며 그것을 퍼부을 대상을 향한 행동이다. 한기총의 반공주의는 좌졸에 바진 개신교 신자들을 그렇게 행동화했다. (127~128쪽)




4장. 현대 일본의 극우주의와 생-정치 - 남상욱


이러한 아베 신조의 정치적 행위를 보다 보면, 박근혜의 통치술이 어떠한 방식으로 행사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주의해야 할 점은,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 라인과, 박정희-박근혜 라인의 삶과 정치 이념적 아이덴티티의 유사성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게 만든다는 명목으로 '그 누군가' 혹은 '다른 누군가'를 죽게 내버려두는 통치 방식의 유사성이다. 우리가 그들의 '유전자' 그 자체에 죄를 묻는 순간,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유전자 역사주의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통치술에 겁먹어 우리가 우리 개인의 생/명/활의 안전에 집착하면 할수록 이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어진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리 입으로 직접 '살게 만들어' 달라고, '지켜달라'고 요구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베 신조가 2013년에 언론의 자유에 치명적인 '특정비밀보호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생의 안전'이라는 '대의'를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165~166쪽)




5장. 극우와 계몽의 변증법-문순표


이념 너머 극단주의와 광신주의가 합리성과 계몽의 논리와 외피를 뒤집어쓰고 출현하는, 열정과 분노가 추상화되지 못하고 수렴되지 못한 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상황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 전략이 주효하다. 청년 마르크스 역시 반극우 전선처럼 종교로부터 인민을 해방하기 위해서 무신론과 계몽주의 전략을 차용했다. 즉, 인민의 허위 이데올로기와 광신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과 교육의 차원에서 해소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그의 전략이 <헤겔 법철학 비판>에 이르러 수정된다. 상상적인 이데올로기를 '계몽'하더라도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는 남아서 어떤 식으로든 기능학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실추상(real abtraction)의 차원에서 종교적 광신주의의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정치적 이념과 기획이 담아내고 추상화하지 못했던 방황하는 현실에 대한 인민의 분노와 좌절이 종교를 통해 추상화되고 있다는 사태에 주목한 것이다. 즉, 종교 비판은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문제 따위가 아니라 세게를 인식하는 '표상/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이고, 따라서 이러한 표상과 재현을 가능케 하는, 하지만 지금은 종교에 포섭되어 있는 인민의 열정과 분노를 어떻게 정치적 이념으로 (실)추상화할 수 있을까, 즉 어떠한 사회적 논리를 개발해서 그 열정과 분노를 추상화할 것인가의 문제로 나아간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하는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기 때문이다. (213~214쪽)




6장. 다시 파시즘을 생각하자-이택광


내 생각에 파시즘을 풀란차스나 그리핀처럼 전간기에 등장한 특수한 상황으로 규정하는 것은 극우주의로서 작동하는 파시즘을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여러 극우주의 중 하나로서 파시즘을 파악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오히려 극의주의 뿌리에 파시즘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극의주의는 세계대전을 통해 극적으로 19세기 경제적 자유주의가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고전적 파시즘의 변용이자 귀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포스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postliberal capitalism)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상품이자 이데올로기적 생산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9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