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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남이 읽은 책

'국가처럼 보기'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는 에코리브르 출판사의 대표가 개인적으로 만날 때마다 오래전부터 '예고'하고 은근 '자랑'하면서 기대감을 나타냈던 책이다. 출간 타이밍을 여러차례 엿보다가 연초에 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역시 여러 신문에서 주목을 했다. 리뷰들을 읽어보니 정치학으로만 분류되기엔 스케일이 방대한 책으로 보인다. 비교역사사회학이라고 해야할까, 여하튼 판에 박힌 정치학 책과는 성격이 다른 것은 분명해 보인다. 3편의 리뷰를 모아봤는데 깊이와 강도가 조금씩 다르다.

아래 리뷰에서 보듯 '가독성'과 '메티스'라는 개념이 중요 분석도구로 사용됐는데 위키피디아에서 'James Scott'을 검색하다보니 재미있는 사례가 소개돼 있다. 사람의 이름을 적는 체계에 관한 것이다. 스콧은 법정에 나온 어느 웨일스 지방 남성이 자신의 이름을 'John, ap Thomas ap William'이라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가 사는 마을에서 이런 이름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John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말하는 순간 자신이 Thomas의 아들이자, William의 손자인 John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여기에다 자신의 고향까지 덧붙일 수도 있다. 그런데 중앙정부로서는 이런 정보가 별로 필요 없고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법정은 John에게 그의 성에 줄줄이 따라붙은 것들 가운데 하나만 골라서 '성'으로 결정하라고 요구한다. 영국식 '이름+성'의 체계에 개인의 이름을 맞추도록 요구한 것이다. 그 이유가 가독성 때문이었다는 것이 스콧의 분석이다.

국가처럼 보기 - 10점
제임스 C. 스콧 지음, 전상인 옮김/에코리브르

4대강 사업이 재앙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
-가독성과 하이 모더니즘 통해 국가 주도의 거시 공공 계획 실패로 귀결되는 까닭 짚어

국가 주도의 거시 공공 계획에 대한 비판서다. 국가의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이 왜 재앙으로 귀결되는지를 살핀다. 인류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예일대 제임스 C 스콧 석좌교수는 ‘가독성’과 ‘하이 모더니즘’ 개념으로 ‘국가처럼 보기’의 관행, 관점의 문제를 짚고 있다.

가독성(可讀性) 개념부터 살펴보자. 근대국가 성립과정에서 국가 과제는 유목민·부랑자, 도주하는 농노·노예를 항구적으로 붙잡아두는 것이었다. 이 정착화는 조세와 징병, 반란 예방을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전근대 국가는 백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또 오랜 내력을 가진 각 지역은 전통·토착의 복잡한 습관과 관행, 구체적 가치·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국가로서는 읽기 어려운 상형문자와 같은 것이었다. 국가는 성씨 창제, 도량형 표준화, 토지조사와 인구등록, 언어·법률 담론의 표준화, 도시설계로 가독성을 높이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가독성’은 지형과 인구를 파악해 생산물·노동력을 증대하고 감시체제를 만들려는 중앙국가의 통치행위였다.

스콧은 문학·예술 비평 용어로 쓰이던 하이 모더니즘을 사회과학 부문의 독창적 개념으로 재정립한다. 하이 모더니즘은 19세기 이후 서유럽·북미에 나타난 과학·기술 진보에 대한 신념이자 자연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변화시키려는 야망이었다. 국가 수반과 관료들은 국가변혁이라는 거대 과업을 목표로 대규모 토건 사업과 중앙집중화된 통신과 교통허브, 대단위 공장과 농장을 선호한 하이 모더니즘의 추종자들이었다.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자신의 계획을 위해 국가 개입을 요구하면서, 하이 모더니즘은 그들의 이익과도 결부됐다.

하지만 그 결과는 주로 재앙일 때가 많았다. 스콧은 대규모 토건사업부터 소련의 집단농장, 중국의 대약진 운동, 탄자니아나 에티오피아의 강제촌락화, 브라질리아 등을 재앙으로 끝난 사례로 제시한다. ‘가독성’을 높이는 통치술이었던 자연과 사회에 대한 행정적 질서화와 하이 모더니즘 이념에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을 위해 강압적 권력을 한껏 사용하려는 의지를 가진 권위주의 국가가 결합하면서 대재앙이 생겼다고 분석한다.

이명박 정부가 녹색성장의 선도모델로 제시하며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도 하이 모더니즘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박정희는 하이 모더니즘을 차용해 건설국가·동원체제를 시도했던 만주국의 경험을 되살려 개발체제를 수립했다. 유럽에서 만주국을 경유한 하이 모더니즘 개발체제는 직선·질서가 반영된 화려한 색감의 조감도를 앞세운 4대강 사업으로 재현되고 있다.

스콧의 말이다. “주민의 가치와 욕구, 반대를 유토피아적 계획과 권위주의적 묵살로 밀어붙이면 실제로 인간의 복지에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책 제목을 빗대면 관습과 다양성 존중, 거대 계획 자제, 분권과 민주주의 심화 같은 ‘국가처럼 보지 않는’ 즉 하이 모더니즘을 줄이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게 결론이다. (김종목 기자, 경향신문 2011.1.8)

국가공공사업의 진짜 의도는? ‘더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제목은 원제 ‘Seeing Like a State’를 직역한 것으로, 국가의 시야나 시각으로 국토나 국민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문제점을 다룬 책이다. 부제 ‘왜 국가는 계획에 실패하는가’에서 이 책이 지향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의 이력을 우선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을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워낙 종횡무진하는 그의 지식과 시야 때문이다. 그는 현재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와 인류학과 그리고 삼림·환경 전공 석좌교수이면서 농업연구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책의 내용으로는 볼 때는 그밖에도 20세기 현대사·건축사·사회사 등의 강의를 맡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두루 해박하면서 그 다양성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통찰이 빛난다.

이 책은 먼저 과학적 조림(造林)이 근대국가의 통제 의지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전근대 국가도 국왕들은 삼림(森林)에 관심이 많았다. 주로 목재를 통한 재정수입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 국가의 관심은 숲이 아니라 돈 되는 나무였다. "자연주의자의 관점에서 볼 때 거의 모든 것이 국가의 좁은 기준틀에서 누락되었다. 빠진 것은 풀·꽃·이끼류·양치식물·관목·덩굴식물 등과 같은 대부분의 식물상이다."

근대국가에 들어서면서 과학적 조림이 시도된다. 군대의 열병식처럼 나무를 종횡의 격자식으로 심는 것이다. 수종(樹種) 또한 마치 단일한 군인처럼 돈 되는 나무로 통일된다. "숲에서는 이제 사냥과 채집, 방목, 어로, 목탄제조, 덫사냥, 귀한 광물질 채집 등이 사라진다." 숲에 담겨 있던 마법이나 도피와 관련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도 이때 없어졌다. ‘숲의 죽음’이고, 이제 ‘나무 공장’이 돼버린 것이다.

18세기 말 독일 프로이센과 작센에서 ‘발명’된 과학적 조림은 전 세계로 파급됐다. 이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과학적 조림의 등장은 (나라별로) 그 시기에 행해진 중앙집권적 방식의 국가사업이라는 큰 맥락을 벗어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국가가 과학적 조림에 나선 이유는 분명하다. 자연에 대한 ‘가독성(可讀性)’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대상을 읽을 수 있어야 이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독성’이란 말은 저자 특유의 개념이다.

도시계획 또한 시민들에 대한 지배와 징세(徵稅)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가독성을 높이려는 조치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루이 나폴레옹 통치 시기 파리시장이었던 오스망 남작이 추진한 파리 재건 사업이 전형적인 사례다. "파리 재건의 논리는 통합적 재정 운영을 위해 오래된 숲을 과학적인 숲으로 변형시키는 논리를 방불케 한다. 단순화, 가독성, 직선, 중앙집중 그리고 전체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똑같이 강조했다." 특히 "새로 설계된 파리는 무엇보다 민중폭동으로부터 안전을 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저자는 근대국가와는 다른 20세기 초 전체주의 또는 권위주의 국가를 분석하기 위해 이번에는 ‘하이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주로 국가를 통해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진보의 혜택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비전이 그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대해 비판적이다. 맹목적인 유토피아 건설의 이상은 결국 디스토피아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적 비전이 악화되는 것은 지배 엘리트들이 민주주의와 시민권에 대한 신념 없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하려고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해 좀더 비판적이다. "20세기가 경험한 대규모 국가 주도 사회공학의 대부분은 좌파적 혹은 혁명적 엘리트들의 과업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정치학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어쩌면 현실주의자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이 모더니즘 이데올로기는 정치를 평가절하하거나 소멸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흔적을 깨끗이 밀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미래사회를 설계하겠다는 자신들의 야망을 반대하는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인물로 저자는 레닌을 든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의 ‘하이 모더니즘’에 반대하여 정치를 살리려 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분석이 여기서 그치면 역사학이지만 저자가 실천적 지혜나 지식을 뜻하는 ‘메티스’라는 고대그리스의 개념을 끌어들이는 순간 현재의 정치·사회 문제가 된다. "권위주의적인 하이 모더니즘은 인간의 창의성을 억압했고, 지역적 다양성을 간과했으며, 무엇보다 현장이나 일상 속에 녹아있는 전통적·토착적·구체적 지식(메티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메티스는 다양한 상황을 견뎌내며 살아남은 관습법일 수도 있고, 시민민주주의의 개방성과 다양성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주목하는 최고의 메티스는 언어다. "언어는 결코 머물지 않는 의미와 지속성이라는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그것을 말하는 그 어느 누구의 임기응변에도 항상 개방되어 있다." 저자가 맡을 수 있는 강좌에 언어철학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이한우 기자, 조선일보 2011.1.8)

[전문가가 본 이 책]국가처럼 보기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질서(Order)와 무질서(Chaos)는 근대가 낳은 쌍둥이이며 근대성이란 ‘질서의 완성을 통한 무질서의 제거’라는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근대성을 깊이 체화한 근대국가는 완벽한 질서를 사회에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제임스 C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는 바우만의 비판적 근대론의 연장선상에서 근대국가가 어떠한 식으로 그 불가능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념적으로, 그리고 체제적으로 진화하였는지를 설명한다. 또 그 정점에 해당하는 20세기 권위주의 정부의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를 분석하며 왜 국민의 공익증대를 위한 사회공학적(social engineering) 노력들이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으로 매듭지어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0세기는 인류의 복지를 획기적으로 증진시키기 위한 초대형 국가 프로젝트가 많았다. 마오쩌둥은 1950년대 후반 중국 농업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농민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수억 명의 중국 농민을 약 2만5000개의 인민공사로 재편했다. 짧은 기간에 서구 선진국의 생산력을 따라 잡고 중국 농민 가정을 가사와 육아 노동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선의에서 출발한 이 노력은 근현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식량부족의 대재앙을 낳았고 3000만이 넘는 중국인이 희생되었다. 이 책에서 사례로 제시하고 있는 탄자니아와 옛 소련의 계획에 의한 촌락과 농장 형성의 시도 역시 되돌릴 수 없는 파탄과 기근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러한 재앙들이 정부의 악마적이고 가학적인 획책이 아니라면 대체 왜 발생한 것일까.

스콧은 재앙의 원인이 네 가지 상이한 요소의 결합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첫째는 국가의 가독성(legible) 향상을 위한 단순화 작업이다. 근대 초기부터 국가는 그 통치 대상을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숲, 농토 등의 공간과 도시, 성(姓), 중량, 언어 등의 생활을 규격화, 정량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자연과 인간생활이 수천 년간 만들어온 보이지 않는, 그러나 지속가능한 많은 질서는 무시되거나 제거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는 19세기의 근대주의에 싹이 트고 20세기 초반에 완성된 하이 모더니즘의 열망이다. 이념적 좌우를 막론하고 20세기 초반을 휩쓴 이 열정은 산업화와 과학, 기술의 진보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며, 국가는 과학적 지식의 권위를 통해 자연과 사회를 역사와 전통과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재편하려고 하였다. 이상의 두 가지는 근대 세계에 모든 국가를 휩쓴 현상으로 어디에서나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으나 지구 곳곳에 있는, 정방형으로 잘 짜인 시카고나 브라질리아 같은 계획도시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위의 두 요소가 모든 근현대 국가들에서 보이는 공통분모라고 한다면 권위주의적 국가와 허약한 시민사회라는 상호 연결된 두 요소는 사회공학적 야망의 파탄을 필연으로 만든다. 국가가 과학적 법칙이라는 명분으로 사회를 과격하게 개조하려 할 때 시민사회는 저항을 통해 일상생활을 유지하였던 토착적이고 실천적인 지혜인 실행지(實行智), 또는 메티스(metis)를 지켜야 한다. 메티스라는 불명확한 개념을 스콧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준법투쟁’이라는 사례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다. 노동조합이 작업지침에 쓰인 대로만 직무를 수행하고 비공식적인 요령과 임기응변을 거부할 때 공장은 멈추고 교통은 마비되기에 이른다. 아무리 자동화와 현대화가 이루어진 곳이라 하여도 생산과 소비는 비공식적인 실행지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으며 이러한 실행지를 끊임없이 축적하고 진화시키는 공간은 국가가 아닌 사회인 것이다. 국가가 억압적이지 않고 시민사회가 강력하다면 행정가나 계획가들의 이상적, 비현실적인 계획들은 국가와 사회의 교섭을 통해 좌절되거나 현실적인 방향으로 개선될 것이다. 반면에 국가의 공상적인 계획들이 국가권력의 독점적 지위를 통해 맹목적으로 수행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동서양과 근현대 200여 년을 아우르는 사례 연구를 통해 근대국가의 깊은 욕망을 읽어내는 이 책은 어떻게 근대의 시장경제가 인류의 일상생활을 근원적으로 변형시켰는지를 추적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비견할 만한 대작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계획’에 대해 과도하게 적대적인 저자의 시각은 요즈음 한국사회 일각에서 보이는 과거 권위주의적 발전국가에 대한 지나치게 긍정적인 향수만큼이나 맹목적이다. 전 국민의 절반이 하이 모더니즘의 흔적이라 할 만한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정상적인 현상은 1970년대 초반 정부의 아파트 홍보 및 주택공사를 통한 대단지 개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수많은 민간 개발업자의 수익창출 노력과 대중의 근대적 삶에 대한 환상이 근저에 있다. 새마을운동 역시 위로부터의 계획만큼이나 밑에서부터의 참여가 그 확산의 요인이었다. 국가는 근대이고 사회는 전통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 역시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몇몇 이론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현대 한국의 국가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화두를 던진다. 다학제적인 접근법은 사회과학을 넘어 도시공학, 농업사회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을 매료시킬 것이다. 원본에 충실한 성실한 번역 역시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이다. (서정민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동아일보 20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