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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구워진 글

[리뷰]정치신학

리뷰 기사로 지면에 소개할 책을 고를 때 내가 원칙 아닌 원칙처럼 삼고 있는 것이 몇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내가 이해(소화)하지 못하는 책은 크게 다루지 않는다'이다. 나는 책에 대한 기사뿐 아니라 모든 기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기자가 소화하지 못하는 내용을 기사로 쓰는 것은 독자에게 정직하지 못한 짓이다. 물론 기자로 일하다보면 까다롭고 어려운 주제의 기사거리를 기사로 소화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경우에도 전문가의 설명을 듣든, 참고자료를 읽든 최대한 사안을 파악해야만 기사다운 기사를 쓸 수 있다.

저자가 학술적으로 매우 유명하거나 책 자체가 널리 알려진 고전일 경우 기자 이전에 독자의 한명으로서 호기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지적 허영이라는게 무시 못할 인간의 욕망이니까. 그런데 출판기자의 경우 이번주에 그 책을 읽으면 그 책에 대해 써야 한다. 욕심을 앞세워 책을 골랐다가 소화는 커녕 다 읽어내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면 대략 난감이다. 물론 보도자료를 베끼든 해제를 베끼든 기사는 쓸 수 있다. 독자가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건 정직하지 못한 짓이다. 선수들 사이에선 한마디로 '쪽'을 파는 일이 된다. 따라서 소화하기 힘든 책을 고르지 않는다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조심하는데 이번주엔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다. 앞서 내 눈높이에 맞는 가라타니 고진, 슬라보예 지젝,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을 용케 골라서 나름 소화하고 리뷰를 썼던 기억이 있는지라 나름 내 선구안을 믿었는데 이번엔 실패를 인정해야 할 듯 하다. 간간이 이름을 들어왔던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은 일단 책의 분량이 100쪽 이내에서 도전해보기로 했는데 쑥스러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 시간의 촉박함이 한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부끄럽지 않을만큼 내가 책을 소화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얼마전 한 출판사의 주간이 '잘 쓰여진 보도자료를 읽는 즐거움'에 대해 말하길래, 나는 '잘 쓰여진 보도자료' 때문에 겪는 고통을 말하며 잘난 척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보도자료가 너무 잘 씌여 있으면 아무래도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가급적 보도자료를 안보고 리뷰를 쓰곤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색하게도 이번 책은 보도자료와 해제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렇게 미진한 마음으로 리뷰를 쓰고나서 조금 지나니 리뷰를 쓸 때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책의 내용이 어렵풋하게나마 잡힌다는거다. 이 책을 보기 위해 얼마전에 나왔으나 보관하지 않았던 <이웃>이라는 책까지 샀는데-아내는 만날 책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 뭔 책을 사느냐고 물었다-매우 간략하게 읽었다. 둘을 함께 읽을 날이 언제쯤 올런지.

9·11 테러 등과 같은 예외상태서 주권자의 독재는 정당?
-파시즘·독재 이데올로기 제시에 여러 사상가들 ‘비판적 극복’ 나서

정치신학 - 10점
칼 슈미트 지음, 김항 옮김/그린비

‘정치적인 행위와 동기로 환원될 수 있는 특수한 정치적인 구별은 동지와 적의 구별이다’란 명제로 유명한 독일 법학자 칼 슈미트(1888~1985)의 문제적 고전이다. 슈미트는 개인사 소개가 필요하다. 그는 1920년대에 <독재>, <정치신학>, <정치적인 것의 개념> 등 일련의 논쟁적 저작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렸다. 1933년에는 베를린대학 교수로 임용됐고, 이후 나치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어용 법학자로 위용을 떨쳤다. 그래서 슈미트는 흔히 파시즘과 독재를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본 파시즘과 한국의 독재정권에도 이론적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슈미트는 2차대전이 끝난 뒤 소련군과 미군에 체포돼 1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고, 이후 고향에서 칩거 중 타계했다.

명실공히 ‘파시즘과 독재의 이데올로그’라 불릴 법하다. 그런데 에티엔 발리바르, 샹탈 무페,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 안토니오 네그리 등 이 시대 지성계의 대스타들이 새삼스레 슈미트에 주목하고 있다. 유럽과 영미권은 물론이요, 일본과 한국에서도 슈미트의 사상에 대한 재평가가 한창이다.

그 이유는 <정치신학>에서도 읽을 수 있다. 슈미트는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 근대국가의 자유주의적 법치주의를 격렬히 비판한다.

영토, 국민과 함께 국가를 구성하는 3대 요소인 주권(主權·sovereignty)에 대한 정의 가운데 자주 인용되는 것은 프랑스 법학자 장 보댕(1530~96)이 말한 ‘공화국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권력’이다. 그런데 슈미트는 주권에 대한 이런 정의는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문제는 구체적인 사태 속에서 주권의 주체가 누구인지 적용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주권을 행사하는 주권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법이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상태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언제 항복하느냐와 같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사안에 관한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문제’처럼 누구도 권한을 갖지 않은 예외상태에서 주권자가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슈미트에게 주권자는 어떤 상태가 예외상태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도 하지만 이 상황을 평정하기 위해 해야할 일도 결정하는 사람이다. 슈미트는 “(주권자는) 헌법을 완전히 효력정지시킬 것인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슈미트의 주장을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평상시 법규범은 예외상태에선 적용될 수 없다. 예외상태에선 ‘결론없는 토의’가 아니라 ‘주권자의 결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예외상태에선 예외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주권자의 독재가 정당화된다.

왠지 낯익지 않은가? 눈치 빠른 사람은 느꼈겠지만 21세기가 시작되자마자 벌어졌던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이 자국민은 물론이요, 전 세계를 대상으로 내놓고 있는 조치들은 대체로 이런 논리의 흔적을 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사상가들이 ‘비판적 극복’을 내걸고 슈미트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런데 왜 제목이 <정치신학>일까. 슈미트는 “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라고 말했다. 전능한 신은 만능의 입법자 또는 주권자의 개념과 유사하고, 법학에서 말하는 예외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정치신학>은 100쪽이 넘지 않는 작은 논문이지만 녹록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슈미트에 처음 도전하는 독자라면 옮김이 김항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의 해제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01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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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같은날 실린 다른 책의 리뷰기사에서 전에 출판담당을 했던 내 옆자리 선배는 '그런데, 왜 140여쪽의 이 책이 양장표지를 해야하는 지는 모르겠다'고 꼬집었는데 그 말은 이 책에도 해당될 것 같다. 이 책은 쪽수가 140여쪽도 안되는데 양장표지이고 값은 선배가 꼬집은 책과 마찬가지로 1만2000원이다.